모 블로그 독서 기록 글에서 발견하여 미리보기로 찾아봤다가 재미있어서 도서관에서 빌려옴. 덕질경험이 있고 그 언저리에서 계속 글을 써가며 살아온 작가의 경험담을 적은 산문이다. 동시대를 사는 여성으로서의 삶과 드러내기 힘들었던 솔직한 마음들에 공감했다. 제목이 딱이다.
나도 모르게 “저는 연락하고 지내는 고등학교 친구가 한 명도 없습니다. 아마 그때 제가 너무 불행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무의식 속에 묻어두었던 진심이었다. p.24
나도 이유를 모르던 심리를 정확하게 표현해준 것 같았다. ‘그때가 너무 불행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왜 ‘그것은 틀렸습니다’라고 말 못 했을까 자책하지 않으면 좋겠어요. 그 순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가 분명 있을 거거든요. 나이가 어려서 혹은 직책이 낮아서일 수도 있고, 나를 어떤 자리에서 자를지 말지를 상대방이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그때 어떻게 하지 못한 것에 대해, 내가 비겁하고 못나서 말 못 했다고 생각하지 말고요. ‘앞으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다시 생각하면 되고, 매번 조금씩만 더 나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사실 여러분 모두 매일매일 너무 고민이 많을 것 같아서 도움이 될지 잘 모르겠어요.” p.32
페미니스트로 사는 것에 대한 말이기도 하지만 삶에 대한 자세로도 읽힌다. 비교적 젊고 경험이 적은 이에게 이렇게 말해주는 게 다정하고도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누군가에게 푹 빠져 이성을 잃는 감각을 사랑했고, 사소한 일에 함께 흥분하거나 열광하는 친구가 있다는 게 너무 즐거워서 멈출 수가 없었다. p. 42
덕질의 재미와 유독한 감각을 모두 정확하게 표현한 문장이라 감탄했다.
내가 사랑했던 그들도 결국 인간이 됐다. (…)내 사랑의 이유 대부분이 그에게서 온 게 아니라 내가 만들어낸 것임을 확인할 수록 최애는 그냥 인간이 되었다.(…)너무 많은 엔딩이 사회면이었다. p. 52
어떤 남자의 팬으로 사는 것은 오랫동안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수많은 아이돌과(…)기타 등등 온갖 분야의 남자들을 따르며 삼십몇 년을 살았다. p.53~54
나에게 너무나 뼈 아픈 문구였다. 이렇게 보니 여성이 스스로가 아닌 다른 남성을 사랑하고 따르는 삶이 얼마나 생각없이 이루어지기 쉬운가. 그런 구조 속에 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너무 쉽게 그들을 사랑하고 존경해온 것으로 충분히 많은 실수를 했다. p.56
그래서 뻔한 얘기를 지루하게 늘어놓는 것 같은 내가 싫어질 때마다, 다음엔 좀 더 재밌게 잘 해봐야지 결심하고 또 실패하면서 계속 산다. p. 73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맏며느리의 딸'이라는 굴레에서 탈출할 수 있게 된 것은 다른 집안의 ‘며느리’가 되면서였다.’ p.140
책이 주는 즐거움과 위안을 온전히 느낀 것은 오랜만이었다. 나는 그냥 읽기만 하면 되었다. 무엇도 증명할 필요가 없었다. 어떤 책들은 내가 그냥 이것밖에 안되는 사람이어도 괜찮다고. 인간의 삶이란 이렇게나 하찮고 우스꽝스럽지만 누구에게나 자기만 아는 빛나는 순간이 있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얻어 동굴에서 빠져나왔다. (…)삶이 불안하고 막막하게 느껴질 때, 목적 없는 독서를 꽤나 괜찮은 약이라고. p.194
책 초반부에 수록된 여성 대상 성폭력에 관한 파트를 읽고 정리하다가 느낀 건데, 숫자화되지 않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치부되는 것 같다. 그리고 이번에 또 생각한 것은 일부러 그렇게 숫자로 정리하고 싶어하지 않는 일이라는 것. 여자의 일이라서?
명확히 보이는데, 보이지 않는 숫자들. 정확히는 안 보이는 척 하는 것들.
그런 점에서 책 후반부의 수록된 '분노의 게이지' 활동 이야기가 정말 필요한 작업이라는 것을 다시 옮겨 적으며 절감한다.
하지만 대충 살면서도 배운 것이 있다면 세상에는 아무래도 어쩔 수 없는 것이 몇 가지 있다는 사실이다. 요즘 내가 계속 생각하는 것은 나는 나일 수밖에 없다는 문제다. 다른 사람. 더 훌륭하고 똑똑하고 멋진 사람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이러고 있는 나. 잘못된 선택과 멍청한 일들로 인생을 낭비했던 나. 세상 잘난 척은 혼자 다 하지만 나만은 모른 척할 수 없는 입만 산 나. 그런데도 계속 내가 데리고 살아가야 할 나. 그런 얘기를 쓰고 싶었다.
에필로그까지 재미있었다.
이런 얘기 하지 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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